[프로젝트 '너머n']판 떠나야 하는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의 ‘자리’ 적극 보장하는 문화예술계… 피해자의 말·시간·자리에 대한 고민 필요
가수 정준영이 2019년 3월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죄송한 척하고 올게.” 2016년 전 연인이 불법촬영 혐의로 가수 정준영을 고소하자, 정씨가 기자회견 직전 지인과 통화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휴대전화가 고장 나서 사설 포렌식(디지털 증거 추출) 업체에 수리를 맡겼다”는 정씨의 일방적 주장을 토대로 수사가 종결(불기소 처분)된 뒤, 정씨는 3개월 정도의 자숙기를 거쳐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여전히 ‘잘나가던’ 그에게 다시 제동이 걸린 건 2018년 시작된 일명 ‘버닝썬 게이트’ 수사 때였다.
신조어 ‘옥백기’ 만들며 연예계 복귀 전망하는 언론
정씨는 술에 취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 등에 대해 2020년 징역 5년이 확정됐고, 2024년 3월19일 새벽 전남 목포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언론은 ‘옥백기’(수감 기간을 연예인 공백기에 빗대어 표현)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정씨의 연예계 복귀 가능성을 앞다퉈 언급한다. ‘정준영 단톡방’ 핵심 멤버인 가수 승리(본명 이승현)와 최종훈은 정씨보다 앞서 출소한 뒤 국외에서 활동 중이다. 그 어디서도 피해자의 말, 시간, 자리에 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대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시인 김요일 강제추행 사건 재판부터다. 그해 10월 트위터(현 엑스)를 통해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 촉발한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고발운동이 이어졌다. 나는 이윤택·하용부·조덕제·김기덕·고은·하일지·박재동·강지환·정준영·최종훈·박진성 등의 민형사 재판을 모니터링했고, 피해자와 연대자들을 만났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알리고 있다.
문화예술계에선 ‘관행’이란 이름의 구조적 성폭력이 용인됐고, ‘강간 문화’ 향유가 ‘특수성’으로 포장됐다. 가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역량 강화나 친분 유지 등을 위한 신체접촉을 했을 뿐이라며 억울해했다. 또한 피해자가 얻었다는 유무형의 이익 등을 강조하며 가해 사실을 부인했다. 성폭력 피해 고발은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관계 유지에 실패한 이들의 음해와 모함이라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계의 위축 가능성을 들어 ‘일반사회’의 시각과 잣대로 사건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그래서일까. 문화예술계는 사법시스템을 통해 성폭력 가해가 인정된 경우에도 ‘일반사회’와는 다르게 가해자의 ‘자리’를 보장하는 모양이다.
대중의 관심이 중요한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 사건으로 고발된 이들의 복귀가 어렵다는 세간의 ‘기대’와 달리, 성폭력 가해자들, 심지어 유죄를 확정받은 이들조차 버젓이 자신들이 활동하던 판으로 돌아갔다. 대표적 사례는 배우 이경영이다. 그는 ‘또경영’(조연으로 여러 작품에 출연)이라는 밈의 주인공으로 맹활약 중이다. 하일지는 화가로 데뷔했으며, 박재동은 만평을 그리고, 고은은 시를 쓰고, 오달수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2>에 캐스팅됐다. ‘정준영 단톡방’ 연루자들이 연예계 은퇴나 자숙을 언급한 것을 뒤집고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도 앞서 문화예술계 성폭력 가해자들이 성공적으로 복귀한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해자 법적 단죄 받아도 피해자는 판에서 떠밀려나가
가해자들이 문화예술계 ‘공범’들과 결탁해 복귀하는 사이, 피해자들의 말은 막히고 시간은 멈췄으며 자리는 사라졌다. 정준영 불법촬영 피해자는 2021년 성범죄 기사 댓글창 폐쇄와 2차 가해자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했고, 언론 인터뷰도 이어갔다. 그러나 2023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피해자의 고통이 여전히 지속되며 일상을 다시 만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임이 간접적으로 드러났다. 가해자가 법적 단죄를 받아도 피해 회복이나 일상 재구성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종사자인 피해자들은 판에서 떠밀려 나가는 사례가 많았다. 작업하고 싶어도 ‘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배제되는 것이다. ‘꽃뱀’ 취급은 물론이고 판을 위축시킨 주범이나 신뢰를 깨뜨린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무서워서 어디 같이 일이나 하겠냐는 비아냥도 접한다.
가해자가 성범죄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한 피해자의 사회 복귀 과정을 지켜봤다. ‘억울하다’는 가해자의 항변을 언론이 검증 없이 내보내고, 대중이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그는 타의로 활동을 중단했다. 작은 일을 시작해도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가해자의 추종자들이 몰려와 피해자와 같이 일하는 이들까지 비난했다. ‘법대로’ 하라고 해서 사법시스템으로 피해를 인정받았지만 그 선택으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와 연대했던 나 역시 고소·고발 협박을 받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피해자는 미래를 꿈꾸지만, 그 모든 과정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기에는 고통이 너무 크다.
배우 오영수가 2024년 3월15일 경기도 성남시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오씨에 대한 공판이 끝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연극계 성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했다. 연합뉴스
<오징어 게임> 속 ‘깐부 할아버지’로 유명해진 원로 연극배우 오영수는 2024년 3월15일 강제추행 혐의로 징역형(집행유예)을 선고받았다. 오씨가 2017년 한 극단의 인턴 단원인 피해자를 두 차례 강제추행했으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딸 같아서”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때, 피해자의 어머니는 딸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여태까지 얘기해온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제 우리 딸 차례인가보다. 그리고 네가 지금 얘기하고 있으니 그다음 차례가 있을 거다.”
가족의 신뢰 덕분이었을까. 피해자는 선고 당일 기자회견에서 대독한 입장문을 통해 연극 공연이 정말 좋다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직업 정체성이 배우이며 굳건하게 자신의 업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바람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피해자·연대자들의 용기에만 기대지 않기를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광주 연극계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연대자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문화예술계 구조적 성폭력에 정면으로 부딪친 피해자·연대자들의 용기가 드러난 현장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의 용기에 기대어 그들만 말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문화예술계가 성폭력 가해자들만의 복귀 장소가 돼서도, 문화예술 특수성이 성폭력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게 두어서도 안 된다. 피해자들이 과거에 묶여 있지 않고 현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그들이 원하는 때 있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의 든든한 연대자가 돼야 한다. 사법적 단죄는 피해 회복의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전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